할 만큼 하고 떠나니 후련 화장품법 제정 큰 자부심 “노병은 죽지 않습니다. 사라질 뿐입니다.” 유상옥 전 대한화장품공업협회장은 퇴임의 변을 묻기도 전에 허허 웃는다. 시원섭섭하지 않느냐는 물음에는 “섭섭한 것은 없어요. 시원합니다.” 사실 유 전회장은 지난달까지 8년을 협회장으로 재임했으니 작고한 서성환 전회장에 이어 두 번째 ‘장수’한 회장이다. 두 번만 했으면 딱 좋았는데 8년 재임은 자의반타의반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화장품업계가 대화가 안 됐어요. 제약계와 달리 결속도 잘 안 됐는데 지금은 화장품산업 위상이 달라져서인지 결속도 잘되는 편입니다.” 유 전회장은 회장 재임 중 무엇을 가장 보람있는 일로 꼽을까. 예상했던 대로 화장품법 제정이었다. 유 전회장은 당시 약사법 그늘에 있던 화장품을 양지로 꺼내어 화장품법을 만들어 오늘날 화장품산업이 제대로 대접받고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틀을 만드는데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정작 유 전회장은 “내가 앞장선 것도 있지만 화장품산업이 규모가 커지고 큰 그릇을 담을 만한 법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라고 말을 돌린다. 화장품 제정까지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입법화하기 훨씬 전 의원입법으로 화장품법을 처리키로 하고 최고위층과 마지막 합의를 본 뒤 차까지 한잔 하고 나왔는데 그만 모의원이 결사반대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당시 정권에서는 안 되고 다음 정권으로 넘어가 처리됐다. 오픈 프라이스제로 불리는 판매자 가격표시제는 유 전회장이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시행 당시인 97년은 저마다 할인 경쟁으로 가격이 엉망이고 시판 상황도 안좋았는데 이 제도를 도입하면서 가격이 안정되며 시판시장의 유통 질서가 회복됐다고 유 전회장은 회고한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엉망입니다. 대형업체들끼리 과당경쟁하는 탓에 가격 질서가 다시 무너져 가슴이 아픕니다.”라고 말한다. 재임 8년 동안 아쉬움도 꽤 있을 것 같다. 지난 8년은 유통구조가 급격히 변화한 시기로써 유 전회장은 수입제품의 범람과 인터넷 쇼핑몰의 극성에 업계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수입 제품이 판치는 것은 결국 국내 업체들의 책임이 큽니다. 우리끼리 서로 과당경쟁하며 유통 질서가 혼란해지니 그 틈을 타 제값 받고 마케팅이 우수한 수입 제품이 득세한 것이죠.” 유 전회장은 할인 경쟁은 메이커와 유통업자 모두의 책임이라고 못박는다. 업체는 리베이트를 안겨주고 대형 전문점은 대량 판매하면서 당장의 이익을 위해 덤핑으로 팔고 하다보니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분석이다. 이야기는 자연 국내 대형사의 책임으로 흐른다. “지금 시판 시장은 사실상 빅 2가 지배하는 것 아닙니까. 이제는 서로 경쟁을 지양하고 시장 질서를 지키는데 앞장 서야 합니다. 중견 업체들과 동반성장한다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힘을 모아 수입제품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지요.” 유 전회장은 최근에도 빅 2에 밀어내기 따위는 하지 말 것을 누누히 그리고 간곡히 설명했다고 한다. 지난달 유 전회장은 퇴임하는 자리에서 이같은 과당경쟁을 막자는 취지에서 이른바 ‘4無 운동’을 제안해 협회 총회의 결정을 이끌어냈다. 과다 판촉물 금지, 부당 스카우트 금지 등을 결의한 이같은 조치는 중견사들로부터 대체로 환영받는 분위기이다.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우리 회사에서 병 샘플을 만들었지 뭡니까. 얼마나 만들었나 물었더니 조금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조금이고 뭐고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야단을 쳤지요.” 과다 판촉물을 뿌리는 것은 ‘정도경영’을 외치는 유 전회장으로선 거의 알레르기에 가까울 정도로 싫어하는 일이다. 유 전회장이 즐겨쓰는 말 중의 하나가 정도경영이다. “이제는 흔한 말이지만 나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부르짖은 것이죠. 기업이 어려울 때 일수록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투명하게 경영하고 소비자에 정직한 기업만이 살아 남는 법입니다.” 그러면서 유 전회장은 기자에게 ‘청부낙업’이란 말 압니까 하고 묻는다. “예전에는 안빈낙도가 선비의 고고한 삶이었지만 이제는 일을 즐기며 깨끗이 돈 버는 것이 가슴에 더 와 닿을 게요.”라며 자신이 붓으로 쓴 ‘작품’을 기자에게 건넨다. 유 전회장은 “그동안 저를 믿고 따라준 회원사에 감사드립니다. 미안한 마음도 큽니다. 어쨌든 회원사가 계속 발전하길 기원합니다.”라고 말했다. 또 “젊고 힘있는 회장이 오셨으니 마음도 홀가분합니다. 업계 발전에 큰 기여를 하리라 믿습니다.”라는 신임 회장에 대한 덕담을 잊지 않았다. - 엄정권 기자 tastoday@csm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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