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이 아우성친다. 발복을 기원하는 글씨… 로드숍 지도… 빡빡한 스케줄표… 벽은 기자의 머리를 대번에 헝클어뜨리고 만다. 이러고도 일이 되나 싶을 만큼 책상도 서류 더미다. 커다란 빨간 가방은 주인이 늘 ‘출장 대기 중’임을 말해주고 있다. 손님을 맞는 하얀 손이 한손에 쏘옥 들어온다. 자그마한 체구에서 폭포수처럼 말이 쏟아진다. 막힘없이 받아 넘기는 것이 얄밉도록 똑소리 난다. “이제 좀 솔직해져야 합니다. 소비자 변화에 맞춰야 하지 않을까요.” 유통 현장의 진단이자 메이커와 유통인들을 향한 뼈있는 일침이다. 소비자들이 이미지 패키지 중심 소비 구조에서 가격대비 가치 만족 지향으로 급변하고 있음을 들려주고 있다. 전문점주들의 고객 응대와 시판의 룰을 지키며 과연 소비자에 충실했는지 돌아보자는 얘기다. 최근 로레알이 전문점과 직거래를 확대하는 등 시판부문에서 일대 변신을 꾀하고 있는 바탕에는 이런 솔직한 고백이 깔려 있다. 직거래는 하나의 방법일 뿐 궁극적으로 철학의 변화를 말한다. 즉 유통 위주에서 소비자 중심으로의 변화다. 점주들에게 파트너십을 제안하고 건강한 유통을 함께 만들어 가자는 동반자 정신이 그 핵이다. 직거래를 하면 매출이 줄지 않을지… “감수합니다. 건전한 유통 소비자와 함께하는 유통이야말로 장수하지 않을까요.” 직거래가 묘약인가. 이 전무도 당당하게 예스라고 하지는 않는다. 당장 해결책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길게 보아 윈윈하는 방법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직거래 전문점엔 백화점에서 판매되는 향수제품을 공급해준다. 점주들에게는 정기적인 맞춤 컨설팅과 다양한 교육이 따른다. 판촉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한편 명예이사로 뽑힌 점주들에겐 다양한 혜택이 주어진다. 경험 많고 쓴소리도 하는 사람들을 가려 뽑았다고 한다. 든든한 시판 참모를 얻은 것이다. 이 전무는 하루 5끼를 먹는다. 먹는다기보다는 주전부리에 가깝다고나 할까. 열정을 쏟아내서인지 늘 배가 고프단다. 로레알의 여자 히딩크다. 페이즐리 문양의 블라우스가 혹시 명품은 아닌지 궁금했다. 중국 벼룩시장에서 산 것이라며 입을 가린다. 내친 김에 청바지는 어떤지…. 미국 출장길에 20달러 준 것이라고. “유통에 산소를 공급할 것입니다.” 이제 시판이 심호흡을 해야 할 차례다. 커피향이 가득한 전망 좋은 방, 기자가 미처 주어 담지 못한 많은 말들이 아우성치며 떠다니고 있었다. (424호 3면) - 엄정권 기자 tastoday@csmt.co.kr - 사진 복세욱 기자 ricky76@c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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